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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문제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진지하게 생각한다.따지고보면 나의 문제라는 것은 그 글자 조합이 가질 것이라고 생각되는 경계보다 매우 모호한 경계를 가지고 있다.그것은 문제라고 여기는 순간부터 내것이 된다. 그리고 중의적이기도 하다.하나는 말 그대로 내가 주인의식을 가지게 된 대상이고 다른 하나는 스스로가 곧 문제인, 즉 나를 개선시킴으로인해 나아질 수 있는 상황들에 대한 포괄적인 표현이다.나는 문득 나의 진지함이 두려움에서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다만 그 두려움은 문제에 굴복하는 것 자체가 아니라, 그로인해 파생되는 부정적인 결과나 감정들에 기인하는 것 같다.가령, 소중한 것을 잃거나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하게 된다거나, 혹은 “집단에서 배제될지도 몰라”, “나로서 인정받지 못할 거야” 같은 막연하지만 인간..
문제가 풀리길 희망하는 곳에서 원인을 찾는다.세상에 대한 내 모델이 정확하면 그것은 효율/효과적인 방법이지만, 그렇다면 애초에 문제라는 것이 발생하지도 않았을 것이다.확증편향의 노예인 우리는 어떤 것이 원인이라고 믿기 시작하면 그것의 당위와 타당함을 지지하는 설명들을 자연스럽게 떠올린다.하지만 그 자연스러움은 순수 이성적이거나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단지 내 안에서 만들어졌을 뿐이다.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자연스러움은 인과를 거스르는 것이다.직관이라는 멋진 이름이 붙은 이 존재를 마치 나의 일부로 받아들여야할 의무가 있는 것 처럼 비단길을 깔아내 극진히 모신다.떠오르는 생각을 모두 다 믿지는 않을 것---그것이 혹자가 요약한 불교의 가르침이지만, 과거 의존적인 내 생각들로 자기만의 성을, 생각을, 모델..
나는 내가 나만의 가치를 좇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다른이의 노력이 나의 재능을 앞서는 것에 내가 엄청난 열등감을 느낀다는 것을 알아채기 전까지는 그랬다. 무엇이 계기가 된 것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 여지껏 내 안에 잔존했던 불안함의 출처를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완벽하지 않은 현실의 나와 무엇이든 이미 최고여야하는 자아상 사이의 간극이 대관절 좁혀지지 않아서 그러했다. 심지어는 어떤 자격과 실력을 갖추어내길 원했던 것이 아니라 그저 천부적인 것으로만 남들보다 상대적으로 더 도드라지길 원했다. 나의 분투가 아닌 타인의 답보를 통해서만 그것을 이루려고 했다. 진짜로 노력했던적은 너무 옛날인 것 같고, 어느샌가 그저 타고난 것으로만, status quo 그 자체가 이미 최고인 결론에 다다르길 원했다..
요즘 하루에 몇 번씩 하는 생각이 있다. 어쩌면 막연한 느낌이기도 하다. 윤달마냥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이상한 시기라는 느낌도 든다. 전체적인 매끄러움을 위해 존재하는 단기 조정기간인 것이다. 바로 지금 손에 잡고 있고 눈앞에 있는 이 일련의 들을 미루자! 지금 연구실이라면 집에 가서 하는 것으로 하자, 지금이 집이라면 내일 연구실에 가서 하는 것으로 하자. 달리 하고싶은 일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현재의 시간을 이 일을 하는 데는 소비하지 말자. 급한 일이 아니니까, 시간이 아직 많이 남았으니까, 내일이 되면, 그때가 되면 시작하는 것으로 하자. 온갖 꾸밈을 당하고 능력을 부여받은 미래의 나는 슈퍼맨이 되고, 지금의 나는 모든걸 내어주어서 초라해진다. 그리고는 지금 당장 하지는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과 막연..
나는 목소리가 작은편이다.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떠한 형태의 대화에서든 전달하고자하는 내용 이외의 것을 앞세우는 사람들을 싫어한다. 언성을 높인다거나, 타인의 말을 침범한다거나, 폭력성을 보인다거나, 자극적인 단어들로 포문을 여는 경우들이 그러하다. 특히나 그것들이 알고봤더니 순전히 이목을 끌기 위한 심산으로, 자기과시적이고 정보량이 미미한 내용이라면 더욱 반감이 생긴다. 표현하고 공유하고자하는 알맹이의 소중함이 아니라 관심 자체가 목적인 소위 관종, 게중에서도 목소리가 큰 관종을 경멸한다. 또, 본인의 생각이 너무나 강해 타인의 의견을 듣는다는 것을 당최 할 수 없는 사람을 마주하면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조성모의 한 노래 가사마냥 자기안에 자기가 너무 많은 이나, 본인의 화를 누르지 못해 스스..
죽음 이후에는 적어도 내가 아는 한 스스로를 포함해 그 어떤것도 지각/자각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 배경이나 문맥에 대해 아는 바는 별로 없지만 "고로 존재한다"로 끝나는 유명한 주장의 대우를 생각해보자면 그렇다. 죽는다는 것이 곧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인지는 알 길이 없어도, 죽음을 떠올려보는 것은 언제나 소름돋게 두렵기만하다. 그 두려움은 압도적인 무한함으로 내가 지금 여기 살아있다는 명확한 사실마저도 너무나 위태롭다고 느껴지게 만드는 총체적 테러이다. 이상하게 요즘들어 죽음을 이해해보려는 무모한 시도를 자주 해보게되고, 그 대가로 전보다 더 높은 차원의 공포를 느끼는 것 같다. 항공우주공학을 전공한다는 점이 무색하게도 나는 타고있는 비행기가 심하게 요동칠때 내가 진짜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
무엇인가를 아는 것을 갈망하는 것은 그 정보 내지는 지식으로 말미암아 어떤 선택을 하기 위함이다. (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들은 지나치게 많기 때문에 모든것을 정확히 다 제대로 알기란 어렵다. 그래서 선택이란 늘 어렵다. 반대로 대단히 많은 것을 이미 잘 알고 있다면 무엇을 선택할지는 자명하다. 사실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선택이랍시고 하는 것은 자의 혹은 자의적 사고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런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없는 필연일 뿐이고, 따라서 이는 스스로가 결정했다거나 판단했다고 하기 어렵다. 과격하게 표현하자면 불완전하고 불확실할때 선택하는 것이야 말로, 그리고 그것만이, 선택이 아닐까..? 특이하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제대로 모르는 상황에서 얼마나 올바르게 알고 있는지 기술할 수..
연구는 컴퓨터가 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하는 것이다. 일전 학과 뉴스레터에서 교수님이 되신 한 동문의 인터뷰 내용을 본 적이 있는데, 그 질문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떤 대답 중 하나로 감명 깊었던 답변이다. 간결하며 옳은 말이다. 이따금씩 추상적이지만 일상 전반에서 어떤 본질과 멀어지고 있는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울 때가 있는데, 논문을 작성할 때 특히 자주 발생하는 예를 들자면, 내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혹은 어떤 맥락을 이어나가야하는지는 뒷전인 채로 방금 작성된 문장이 대관절 문법에 맞는지, 상상속에만 존재하는 초월적인 전문가를 내세워서 그 혹은 그녀가 읽기에도 멋들어지고 괜찮은 표현인지, 여러 그래프들이 적당한 크기로 적당한 모양으로 적당한 위치에 자리잡고 있는지, 지나친 뇌피셜로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