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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버깅

junwoopark 2025. 2. 2. 23:36

문제가 풀리길 희망하는 곳에서 원인을 찾는다.
세상에 대한 내 모델이 정확하면 그것은 효율/효과적인 방법이지만, 그렇다면 애초에 문제라는 것이 발생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확증편향의 노예인 우리는 어떤 것이 원인이라고 믿기 시작하면 그것의 당위와 타당함을 지지하는 설명들을 자연스럽게 떠올린다.
하지만 그 자연스러움은 순수 이성적이거나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단지 내 안에서 만들어졌을 뿐이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자연스러움은 인과를 거스르는 것이다.
직관이라는 멋진 이름이 붙은 이 존재를 마치 나의 일부로 받아들여야할 의무가 있는 것 처럼 비단길을 깔아내 극진히 모신다.
떠오르는 생각을 모두 다 믿지는 않을 것---그것이 혹자가 요약한 불교의 가르침이지만, 과거 의존적인 내 생각들로 자기만의 성을, 생각을, 모델을 굳건히 편향시키는 것은 너무나 쉽다.
어쩌면 우리는 인생의 x0로, 그리고 가능했다면 u0를 통해 조금 더, 결정된 흐름에 몸을 싣는 것이 너무나 편할 뿐이다.
모든 믿음은 어느정도 자기 실현적인 측면이 있지만 (나는 실패할거야!), 어떤 것을 참이라고 믿는 것이 그것에 대해 보장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세계가 굴러가는 규칙의 지배를 받는다.
 
요상한 말장난이지만, 확증편향의 가장 큰 문제는 진짜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부작용으로 문제가 아닌 가상의 문제를 도입하기 때문에 올바른 해결책이 아닌 것에 매몰되고, 집착하게 되고, 종국에는 타인의 답보와 같이 순수하게 내가 조절할 수 없는 것들에 의존하게 된다.
풀리지 않는 것에 대한 귀책을 내가 아닌 다른 곳에 강제하려는 심산이다.
그러면 이제 요컨대 내 지성이, 내 머리속 모델이, 내가 세상을 잘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세상이 내 모델에 부합하지 않게 되는것이다.
애석하게도 그 편이 문제를 직접 해결하는 것 보다 지나치게 쉽다.
그래서 그 말장난은 요약하자면 원문제의 부정이자 포기인 것이다.

우리는 종종 오만하게도 least action으로 천지개벽을 원한다.
이는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럽고 효율적인 측면이 있다. LQR같은게 있다.
혹자는 그것이 단 하나의 물리 원칙이라고도 한다.
디버깅이 실패하는 주된 이유는 전자의 편안함에 눈이 멀어 통제 가능하다고 여기는 범위에서 너무나 많은 것을 배제했기 때문이다.
색안경을 벗고 정말 곰곰히 생각해보면 스스로가 보기에도 터무니 없는 이유들일텐데, 이건 이래서 할 수 없고 저건 저래서 취할 수 없는 접근이라는 식으로 least action의 당위를 찾는다.
가령, 높은 확률로 잘못된 것은 부주의한 구현체일테지만 그것을 평가한 뒤 하나하나 분석하고 해체해 다시 쌓아나가는것이 마냥 힘들고 어렵기 때문에, 막연히 하기 싫기 때문에, 이곳에는 문제가 없다는 결론을 선행하고 과소/과대 설정된 공분산이 만악의 근원인 것 마냥 하루 종일 그 값을 바꿔가며 필터를 안정화하려드는 것이다.
결국 후행하는 것은 끝없이 되풀이되는 왜 안되지?와 내 문제는 아닌것 같은데?이다.
무수한 자기 기만의 역사가 스스로의 완전함만을 목적으로했기 때문에 그곳에 이제 해답은 없다.
천지개벽을 원한다면 고통스러운 역치를 넘어야할 것이며, 편안함에 기댈것이라면 답보하는 상황 일체에 불만을 가져선 안될것이다.
어쩌면 진짜 문제는 천지개벽을 갈망하는 데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끝없는 자기 모순은 쉬이 극복되지 않는다.
 
한편 스트레스라는 것은, 그것이 당장은 그렇지 않아 보일지라도, 통제가능한 것들을 관망할 때 찾아온다(고한다).
인간을 행동하게 하는 기작은 어떻게 보면 너무나 암시적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너무나 자명한 구석이 있다.
그것이 너무나 당연해서 우리는 의식적으로 무엇인가를 선택할 필요조차 없고, 단지 내 안에 피어난 심상과 생각, 요약하자면 스트레스를 적나라하게 읽어내기만 하면 될 정도이다.
그러면 문자 그대로 자동적으로 무엇인가가,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나아진다.
나의 행동을 통해 실질적인 변화를 초래해서든, 단지 그것을 알아차린 것만으로든 말이다.
스트레스는 그 이름에 엉겨붙은 불쾌함 만큼 꺼려야할 대상이 아니고, 내가 나에게 보내는 힌트같은 것이다.
고통으로 인식되는 모든 것들은 결국 내가 붙잡고 있는것이 아니었던가.
소위 훌륭한, 훌륭했던 인물들은 대개 인간이 가진 이 자연스러운 흐름을 존중했던 것이 아닐까.
모든 답은 내 안에 있다는 말이 그저 뜬구름잡는 피상적인 말이 아니라, 진짜였던 것임..

아무튼.. 디버깅은 이 기척을 묵살한채 일관되게 인과에 반했던 관성을 부수고 나올때 비로서 시작하는 것 같다.
부수는 김에 뻣뻣하디 뻣뻣한 내 모델도 부수어내 날것의 원문제를 인정하고, 설령 그것이 maximum action이 될지라도, 이른바 backward reachable set을 식별해 그럴싸한 접근법을 택해야한다.
고장난 기계장치를 다짜고짜 몇 대 후려쳤더니 모든것이 제자리로 돌아오는것은 오직 영화적 장치로 기능할 뿐이다.
인과 엔진을 역재생하는 (무엇이 원인이었을까?) 것은 직관적이지 않은, 순수 이성적인 일이고 당연하게도 쉬운일이 아니며 스트레스ㅡful하다.
그래서 우리는 스트레스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정확히는, 통제하는 것이 유익함과 동시에 내가 실제로 통제할 수 있는 일들이 자기편향된 생각과 의미없는 규칙들에 가려 종종 올바르게 인식되고 있지 않다는 점을 경고하는 기작이 바로 스트레스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그곳에 디버깅이 있다.
다만 아쉽게도, 그럴싸함을 잘 알아보는 것은 순수한 재능의 영역이거나 우직한 경험으로 길러내는 것이 유일한 방법인 것 같다.
요즘은 내 알량한 모델에 기대어 교착상태에 빠지느니,
선입견을 배제하고 unbiased sampling을 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을 한다.
 
요약하자면 확증편향은 자기 중심적인 기작이고, 스트레스는 문제 중심적인 기작이다.
내 마음을 편하게 하는 것과 실존하는 무엇인가를 해결하는 관점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그 둘은 욕망의 존재로 인해 대체로 합치하지 않으므로.
전자는 내 오만함에 대한 아첨이고, 스트레스는 그 콧대높은 뻣뻣함을 해체해야한다는 경고이다.
세상이 내가 가진 정답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내 아집이 지나치게 많은 것을 제한하고 있는 것이다.
나의 경험은 나의 지식과 더불어 완벽하지 않다.
그것들은 그럴 필요가 없을 뿐더러 그럴 수도 없다.
자가 확증은 대개 해롭다.
그것은 스스로로 하여금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강화할때만 유의미하다.
이는 문득 엄습한 파괴적 불안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을 탈락시키는 도구여야하지, 스트레스를 무시하는 용도로 쓰여선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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