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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과 연결 본문

일기

소통과 연결

junwoopark 2022. 12. 27. 02:57

나는 목소리가 작은편이다.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떠한 형태의 대화에서든 전달하고자하는 내용 이외의 것을 앞세우는 사람들을 싫어한다.
언성을 높인다거나, 타인의 말을 침범한다거나, 폭력성을 보인다거나, 자극적인 단어들로 포문을 여는 경우들이 그러하다.
특히나 그것들이 알고봤더니 순전히 이목을 끌기 위한 심산으로, 자기과시적이고 정보량이 미미한 내용이라면 더욱 반감이 생긴다.
표현하고 공유하고자하는 알맹이의 소중함이 아니라 관심 자체가 목적인 소위 관종, 게중에서도 목소리가 큰 관종을 경멸한다.
또, 본인의 생각이 너무나 강해 타인의 의견을 듣는다는 것을 당최 할 수 없는 사람을 마주하면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조성모의 한 노래 가사마냥 자기안에 자기가 너무 많은 이나, 본인의 화를 누르지 못해 스스로에게 잡아 먹혀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일단 내뱉고봐야하는 사람들이 그러하다.
나는 그런 이들 모두를 멀리한다.
그런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아마 나의 의견이, 그 경중은 차치하고서라도, 대체로 묵살되어버리기 때문일것이다.
서로가 각자 안의 소중한 무엇인가를 교환하는 양방향 통신이어야만 의미를 지닌다.

 


언어라는 것은 신기하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특히 그것이 최초로 개발(?) 되었을 시점을 생각해보면 더더욱 그렇다.
특정 의미를 가지는 부분을 그런 의미로 합의하자는 소통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공간적으로 시간적으로 여러 그룹의 사람들이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한다는 점도 신기하다.
완벽하게 같은 경험을 했을지라도 다른 언어를 쓴다면 그것을 기술할 수 있는 범위나 방법이 달라질 것이고, 남에게 표현할 수 있는 수준이나 순서, 반대로 나에게 돌아오는 말들도 다 다를것이다.
우리가 생각이라는 이름을 붙여 자행하는 것들이 뇌에서는 청각적 자극으로 받아들여진다고 하는데(카더라), 나와 다른 언어의 사용자들은 해당 자극의 통로들이 완전히 뒤바껴서 그들의 삶 내내 나와는 완전히 다른 경험을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래서 다른 언어로 생각해보는 것이 매우 흥미롭다고 생각한다.
아주 낮은 수준에서부터 이전과는 다른 경험을 할 수도 있고, 어쩌면 내가 사고하는 방식이나 범위를 확장할 수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에 한국어와 영어가 아닌 언어를 알고 싶기도 하다. 여기서 언어라고 하면 독일어와 같은 자연어와 더불어 프로그래밍 언어도 포함된다.
영화 컨택트 (2017) 에 이와 비슷한 개념이 등장하기도 한다.
영화를 생각해보면 또 재미있는 점을 떠올릴 수 있는데, 뜸들여서 강조되어야 하는 부분이 선행하는지 후행하는지가 언어에따라 다르고 따라서 번역과 자막의 순서가 바뀔때가 있다.
한편, 같은 언어 같은 말일지라도 어떤 음역대에서 어떤 악센트로 표현되느냐에 따라 상이한 결과를 불러올 수 있다.
예컨대 전라도와 경상도 사람들은 생각보다 더 근본적인 수준에서 많은 차이를 보일지도 모를일이다.
이런 맥락에서 언어란 어쩌면 관념과 심상을 매개하는 캐리어 웨이브 정도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의미있는 소통을 위해서는 서로의 주파수가 맞아야하는 것이다.
그리고 올바른 채널과 대역을 선택하는 것은 표현 방식이나, 악센트, 단어, 문맥, 심지어는 어감이나 문화적 배경까지도 모두 포함한 복잡한 문제이다.
논문에서는 일련의 소통의 오해를 줄이기 위해 공통의 기호적 언어인 수학과 표준 자연어인 영어를 활용하는 것이 아닐까, 또한 해석의 다양성을 제한한 written form이 실로 더 적합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내 논문들은 멀쩡한가를 우선 돌아봐야겠지만 그래서 나는 최소한의 공통된 표준, 예컨대 문법, 표기법, 그 분야에서 통용되는 상호 협의된 기술 방법 일체를 지키지 않는 논문이나 자료들을 볼때면 그 알맹이의 독창성은 뒷전이고 불쾌함이 앞선다.
이것은 어쩌면 출판되어 널리 읽히기엔 너무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요소들이 가득한 것이 아닐까 하여서 말이다.
재미있는 발견을 모두가 이해할 수 있게 소개하고 공유하려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에서 그 목적이 변질되어 논문을 위한 논문이 되어버린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언어의 한계가 그 사람의 세계의 한계라는 아주 멋진 말이 있다.
각자가 사용하는 언어의 비대칭성 때문일 수도 있고, 각자가 가진 어휘나 표현 방식의 한계 때문일 수도 있고, 개인의 성향 때문일 수도 있고 어쩌면 단지 그 순간의 기분 때문일 수도 있지만 우리는 안타깝게도 늘 오해한다.
각자 안의 원 관념들은 매우 자주, 그리고 매우 높은 확률로 서로 대응되지 않는다.
언어가 충분히 정교하지 않기 때문일까 우리 안의 심상이 지나치게 섬세하기 때문일까.
어느쪽이든, 나의 세계가 그/그녀의 세계와 너무나 다를지라도, 그렇기 때문에 나는 보통 신중을 기한다.
과연 나는 내 안의 원 관념, 원 심상을 올바르게 제대로 전달하고 있을까?
너무 편하거나 틀에박힌 방식으로만 표현한다면 그것이 가진 소중함이나 본질, 독창성을 제대로 포획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또한 반대로 나는 다른 사람이 의도한 정서를, 그 심상을 옳게 이해하고 있을까 하는 고민들을 하면서 말이다.
한편, 어떤 알맹이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맥락 안에서 존재할때도 있다.
나는 그래서 서로에게 공유된 맥락이 미진한 상황에서 다짜고짜 던져지는 말들에 종종 스트레스를 받는다.
지나치게 추상화된 표현이라던가, 특정 집단/세대에서만 쓰이는 표현, 특정 경험을 공유해야지만 알 수 있는 것들 모두가 무례하다고 생각한다. 앞뒤없이 맥락없이 내뱉어지는 말들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에게 지나치게 많은 노력을 요구한다.
그래서 반대로 나는 말하기 전에 내가 투척해버릴 표현이 타인 안에 부드럽게 안착할 수 있을까 고민해보곤 한다.
어느 정도의, 어떤 수준의 맥락을 같이 던져줘야 상대가 편하게 받을 수 있을까.
그러다보면 말 수가 적어지거나, 말이 느려지기도 하고 목소리가 더 작아지기도 한다.
비슷한 결에서 두괄식의 글은 다소 거칠고 이기적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본인이 첨부한 맥락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이들을 보는 것도 부담스럽다.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상급자에게 전하는) 수고하세요, 원인을 다시 수식하는 결과들, 실제로는 다른 의도를 교묘히 숨겨 아닌척 하는 말들이 그러하다.
이렇게 보니 나는 소통이 어렵다고 생각하거나 그 과정에서 스트레스를 받는 대상이 참 많은 것 같다.
어쩌면 내가 지나치게 다양하고 엄격한 기준을 내세우는 것일수도 있고, 어쩌면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너무 많은것을 간과하는 것일수도 있겠지만 나는 오만하게도 그럴때마다 상대의 세상이 편협한 까닭이라고 단정짓는 것 같다.
높은 확률로 단순히 서로 다른, 서로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채널로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은 잊고 말이다.


아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나는 최근까지 이전 일기(2022.07.11 - [일기] - 죽음과 사랑(?))와 관련된 내용으로 극심한 불안에 사로잡혀 심리 상담을 받아왔었다.
앞서 사용했던 주파수라는 말은 사실 상담 선생님이 쓰신 표현인데, 개인적으로 두 개인의 주파수가 통한다라는 말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모든 상담 세션들이 힘이 되었고 어쩔때는 생각할 거리를 많이 안겨주었는데, 그것이 특별히 대단한 해결책을 마련해주어서가 아니라 (돌이켜보니) 오롯이 스스로를, 그리고 스스로만을, 관찰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도와주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내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길 원한다고 말했었다.
그러자 선생님이 그럼 준우씨는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받아들이고 있느냐 되물었는데 나는 선뜻 자신있게 그렇다고 이야기할 수 없었다. 이유를 붙이기는 까다로웠고 다만 직관적으로 그러했다.
상대가 누가 되었든 무엇이 되었든 나는 있는 그대로의 나로 받아들여지길 바란다는 생각을 한다.
일체의 왜곡없이 알맹이 그대로로서 이해받고싶고 본연의 모습으로 받아들여지고 싶은 마음이다.
내가 올바른 소통에 예민한 이유는 어쩌면 이러한 욕망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불완전한 수단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왜곡을 그래도 최선으로 줄이고자 이런 저런 요소들을 신경쓰고, 어쩌면 나만 아둥바둥 노력을 하는 것은 아닌가 허탈하기도 하면서, 그럼에도 다시 나를 제대로 비추어내고싶다는 생각들의 반복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머리를 빡빡 깎은 뒤 절에 들어가지 않고 소통을 붙잡고 있는가도 생각해볼 수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내가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느끼기 위함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니, 물물교환을 위해서 언어가 발달했니와 같은 이유들은 아무래도 좋고, 다만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고 나를 이해하는 이가 나 이외에도 있다는 점에서 이 불안을 잠재울 위안을 찾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목소리를 과하게 키운 사람들이나 귀를 닫은 이들 모두는 사실 다른 이들과 더 극적으로 연결되고 싶은 것은 아니었을까.
나에게 그들을 평가 (특히 평가 절하) 할 권리가 있을까, 혼자이고싶지 않은 마음의 극적인 방출들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들을 하며 나의 오만을 뒤돌아본다.
또한 아이러니하게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길 원한다고 해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여전히 나를 왜곡해서 내어놓는 것 뿐이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왜곡하는 이가 역변환을 잘 했으리라고 바라는 것이다.
어떤이에겐 내 최선의 왜곡이 또 다른 형태의 극심한 스트레스가 될 지도 모르겠다.
한편, 그 욕망이 애초에 채워질 수 있는 항아리인가를 생각해보는 것은 조금 다른 문제인데 그 원 심상이라는 것, "나"의 실체가 대관절 무엇인가를 알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언어를 포함한 인간의 표현 수단의 총체가 충분히 정교하지 못해 미처 다 기술하지 못하는 미묘함이 어디에 그 뿌리를 두고있는지를 말이다.
이를 뇌속에 피어오르는 전압과 같은 단순한 전기적 신호의 시/공간적인 나열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에겐 이미 언어보다 더 좋은 정교한 수단이 많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육체적 교류 없이 예컨대 머리에 칩을 박은채로 상대를 이해하는 모습은 다소 역겨운 구석이 있다.
반면 우리의 현상적인 경험이 고작 전기 신호 따위들로 인코딩될 수 있을까 하는 조금 회의적인 시각을 가져볼 수도 있는데, 이는 나의 세상에서 내가 의식하는 빨강색이 다른이의 세상에서의 빨강과 같을까하는 어쩌면 철학적인, 아직 그 누구도 답을 하지 못한 질문에 봉착하게 한다.
그것이 같다는 것을 끝내 밝힐 수 없다면 원 심상의 동기화라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고 여겨야하는 것이 아닐까.
인류가 여태 알아낸 지식을 아득히 넘어서 뇌 구조를 포함해 인간이 현상을 경험하게 하는 일련의 체계와 메모리, 그리고 아직은 모른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그 모든 것들을 복사해야지만 한 사람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늘 오해한다고 하지만 어쩌면 그전에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싶다고 하지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을지도 모를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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