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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지함과 두려움 본문
내 문제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진지하게 생각한다.
따지고보면 나의 문제라는 것은 그 글자 조합이 가질 것이라고 생각되는 경계보다 매우 모호한 경계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문제라고 여기는 순간부터 내것이 된다. 그리고 중의적이기도 하다.
하나는 말 그대로 내가 주인의식을 가지게 된 대상이고 다른 하나는 스스로가 곧 문제인, 즉 나를 개선시킴으로인해 나아질 수 있는 상황들에 대한 포괄적인 표현이다.
나는 문득 나의 진지함이 두려움에서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그 두려움은 문제에 굴복하는 것 자체가 아니라, 그로인해 파생되는 부정적인 결과나 감정들에 기인하는 것 같다.
가령, 소중한 것을 잃거나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하게 된다거나, 혹은 “집단에서 배제될지도 몰라”, “나로서 인정받지 못할 거야” 같은 막연하지만 인간 깊숙히 자리잡은 본능적인 두려움에 사로잡혔던 과거의 경험들 말이다.
극적인 추상화를 통하자면 "사랑받지 못하면 어떡하지?"와 결을 같이하는 두려움일 것이다.
한편, 꽤 오랜 옛날부터 이런 가설을 종종 생각한다.
무엇을 진정 원한다면 오히려 그것에서부터 자유로워야하는 것이 아닐까.
예컨대 이런식이다.
오히려 용서하여 놓아준 이에게서 받은 사과야말로 진정으로 수용할 수 있다.
사랑 없이도 살 수 있을만큼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인간이야말로 사랑받는다.
그래서 그 생각을 조금만 틀어보면 구애받지 않는 이야 말로 그 어떤 것을 진정으로 성취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패배하는 것이 더 두렵다고 느껴지는 문제들을 오히려 더 가볍게, 더 진지하지 않게 대해야한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아이러니하게도 어떤 것이 절실히 되고싶고 그것을 하고싶다면 설령 그것이 되지 못해도 그것을 하지 않아도 좋은 상태여야한다는 것이다.
이런 모순 때문에 과거의 몇몇 현자들은 그 무엇인가를 바라는 욕심 자체가 '진짜 문제'이고, 그것을 버릴때 진정으로 최선의 상태인 중용에 다다를 수 있다는 결론을 낸 것이 아닐까 감히 추측해본다.
내 경험들을 다소 대담하게 뒤돌아보자면, 타인이 고민하고 불안해하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서는 이러쿵 저러쿵 해결책을 잘 도출해내었다.
그리고 그것이 학술적/공학적인 것이든, 개인적이고 감정적인 것이든 나의 조언과 생각들은 대체로 합리적이고 유효할 때가 많았다.
나의 문제인 것 처럼 지나치게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았고 (실제로 내 문제는 아니므로), 적당한 거리에서 적당한 가벼움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더 잘 이해하고 풀이하게 되었다.
마치 어떤식으로 전개되어도 나에게는 전혀 영향이 없는 것 처럼, 그저 눈앞에 재생되는 영화와 같은 2차적인 현실인 것 마냥, 몇 발자국 물러나 가벼운 마음으로 임해야 더 잘 풀게 된다.
대충 지지자 < 호지자 < 락지자 하는 격언이 이와 비슷한 맥락 아니겠는가.
하지만 너무나 짜증나게도 나의 문제에 대해서는 그것이 쉬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다.
요 몇달간 나의 미래와 진로를 생각하다보니, 내가 나의 주된 일과들을 대체로 즐기고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나의 문제들에 대해 그것들이 풀리는 형태/방식에 대한 집착 내지는 고집을 부리고 있기 때문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가령, 나는 이러한 종류의 사람이고 저걸 하려면 반드시 어떤 것을 할줄 알아야하고 (반복), 그 어떤것은 이 길과 방법이 유일하고, 등등.
그러나 곰곰히 똑바로 바라보면 집착이라는 것도 두려움에서 온다. "가지지 못하면 어떡하지?"
마치 나의 고집과 집착을 해제하는 순간 모든것이 잘못될 것이라는 막연한, 하지만 명백히 틀린 믿음에 눈이 멀어 어린아이와 같은 떼를 쓰는 것 뿐이다.
집착의 본모습도 두려움이다.
지나친 진지함도 결국엔 두려움이 빚어낸 것일 뿐이다.
두려움이 나를 즐기지 못하게 하고, 두려워 긴장하고 있으니 그저 뻣뻣할 뿐이다.
반드시 그래야만하는, 그래야만 더 좋은 것들은 딱히 없다.
그것에 집착하면 집착할 수록 멀어지며 나는 그 모든것을 (가령 내 인생의) 연극의 일부로 받아들여야할 필요가 있다.
진짜 연극과 다른점은 모든 것이 단순히 내가 내린 선택에 따라 분기한다는 것 뿐이며, 따라서 즉흥연기만이 있다는 것이다.
또 한편, 락지자가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은 주객전도라고 생각한다.
가령, 충분히 사랑스러운 사람이 되기 위해 혹은 되는 것을 목적으로, 의도적으로 사랑이 필요함을 부정하고 멀어져야한다면 너무나 괴롭지 않겠는가.
이미 나에게 중요한 문제를, 그것을 조금 더 잘 풀어내는 것을 목적으로, 의도적으로 관망하고 그것이 마치 나에게 아무 가치도 없다는 듯 행동해야한다는 것들 말이다.
이 역설적인 행동은 시니컬함으로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락지자를 연기하는 지지자, 혹은 호지자가 내는 부자연스러움인 것이다.
생각해보면 나의 문제에서 더 중요하게 다루어야하는 것은 문제 부분이 아니라 '나' 부분이다.
러셀의 역설과 같이 self-referencing이 모순을 가져온다는 것은 이미 너무나 유명하지 않은가.
나는 나 스스로를 너무 가까이서 관찰하고 평가하지 않을 필요가 있다.
고정불변의 나를 무한히 재참조하는 재귀가 아니라 시간이 매개된 마르코프 체인이며, 나는 다음 상태의 나를 생산하는 actor일 뿐이다.
두려움의 고리를 끊는 것은 단순 긍정에 있고 근거가 필요 없는 순수 긍정, 혹은 이미 근거가 차고 넘치는 보장된 긍정에 의지할 수 있다.
그것이 만트라가 되었든 자기확언이 되었든 구체적인 방법들은 유투브에 차고 넘쳐 고르기가 어려울 지경이고, 나중에 볼 동영상에 저장된 것들을 하나씩 (하지만 확실히) 그저 베껴보면 될 일이다.
이것은 스스로를 타자화해야, 더 가볍게 여겨야 더 자기일 수 있는 하나의 놀이일 뿐이라고 생각해보자.
재미는 커녕 그것이 두렵기만 하다면 놀이를 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