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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 본문
무엇인가를 아는 것을 갈망하는 것은 그 정보 내지는 지식으로 말미암아 어떤 선택을 하기 위함이다. (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들은 지나치게 많기 때문에 모든것을 정확히 다 제대로 알기란 어렵다.
그래서 선택이란 늘 어렵다.
반대로 대단히 많은 것을 이미 잘 알고 있다면 무엇을 선택할지는 자명하다.
사실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선택이랍시고 하는 것은 자의 혹은 자의적 사고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런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없는 필연일 뿐이고, 따라서 이는 스스로가 결정했다거나 판단했다고 하기 어렵다.
과격하게 표현하자면 불완전하고 불확실할때 선택하는 것이야 말로, 그리고 그것만이, 선택이 아닐까..?
특이하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제대로 모르는 상황에서 얼마나 올바르게 알고 있는지 기술할 수는 없어도, 얼마나 불확실한지는 기술할 수 있다.
따라서 정확성을 높이는 방향의 선택이란 불가능하고, 불확실성을 낮추는 방향의 선택만이 가능하다.
어떤 이상과 목표를 가지고 이를 곧장 바라보며 나아가는 것은 다소 무모한 것이고, 이대로라면 내가 언제고 맞닥뜨릴지도 모르는 상상가능한 모든 형태의 미완, 결함, 디스토피아로부터 도망치는 것이 합리적이다.
예컨대 여느 피아니스트든 대관절 리스트나 쇼팽이 되기 위해 연습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고 잘못된 건반을 누르지 않기 위해 연습해야하며, 어떤 습관이 건강 개선에 도움이 될지는 미지의 영역이지만, 특정 행동 양식들은 확실하게 건강을 해치므로 이를 실천하지 않는 선택을 해야한다.
이런 맥락에서 모종의 서프라이즈들을 억제하고, 경험적으로 일관된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는 루틴이라는 것은 중요하다.
많은 날을 검정색 상의와 청바지만 입었던 어떤 한 사람은 connecting dots looking forward는 불가능하고, 지나온길을 뒤돌아 봤을때만이 가능하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 유명한 40-70 rule 이라는 것이 있다.
어떤 무결한 결정에 필요한 정보량이 100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40보다 적을 때 내린 결정은 틀릴 가능성이 높고, 70보다 많을 때 내린 결정인 이미 그 시기가 늦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앞선 내용을 곱씹어보자면, 정보량이라고 표현된 그 숫자는 불확실함의 역인 신뢰 내지는 확신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겠다.
완전함과 신속함 그 사이에서 균형을 맞춰야한다는 것이 요지이다.
하지만 일상다반사를 포함해 중요한 사안에 대해서도 그 숫자를 높이기 어려운 상황에서 내가 취하는 전략은 예컨대, 부끄러운 선택을 하느니 선택 자체를 무기한 보류하는 것이었다.
잘못된 의사결정을 하는 것이 두려워 그것이 반드시 필요한 시점이 지날때까지도 결정을 내리지 않고, 내가 저지를지도 모르는 미숙에서 멀어지고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자체로 이미 완전한 패배인 모순적인 선택을 하곤 한다.
그것이 나에게 소중하면 소중할수록, 여지껏 지켜낸 무구함이 더럽혀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더 그렇다.
모종의 내/외적 압력을 견디기 어려워질때까지 미루어내다가 외통수를 맞이할때야 겨우, 그리고 그제서도 겨우 타행할 뿐이다.
꽤 오랜 시간을 알고 지낸, 그리고 대개 신뢰할 수 있는 동료가 있는데 내가 가진 기준이 너무 높다고 얘기할 때가 더러있다.
초월적인 조건을 내걸고 이를 영원히 뛰어넘지 못해 스스로를 만족시키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이 미련함이 남들 보기에도 보이는 것이다.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본다는 것이 대관절 어떻게 가능하겠냐만은, 그 누구보다 먼저 엄격함과 자조를 내세운다고 될 일도 아니다.
그런 극단적임 때문에 나는 잠재력 내지는 가능성이라는 희망적인 개념에 절여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독창성으로 대변되는 내 의견들이, 사실은 고작 나일 뿐인, 내 상상속 초인에게 짓밟히느니 차라리 그를 뛰어넘을 수도 있는, 그 무엇이든 할 수 있는 희망찬 상태에 남아있으려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하지만 아이디어와 가능성은 오직 그 시현과 시행으로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또한 이는 좋게 포장했을때야 가능성이며 잠재력이지, 다르게 표현하자면 무지이고 불확실함의 방관이다.
결국 내가 불안한 근본적인 이유는 어떤 의사결정을 확실히 하지 않아서 잠재력이라는 것으로 포장한 무수한 불확실성을 남겨 놓았기 때문이 아닐까.
다소 과장하자면 이는 양성 피드백 되는데, 무지에서 불안이 태어나고, 불안함에 선택을 미루고, 미결이 무지를 키우는 꼴이다.
예컨대 제때 풀지 않고 미루어 놓아서, 끝없이 변수를 추가하기만 하여서, 원래는 그리 크지 않았던 문제가 이제는 나 하나의 뇌용량으로는 최적화하는 것이 불가능해질 정도로 복잡해졌고, 솔버에 넣어봤더니 Infeasible이 떠버린 난감한 상황이다.
확실하다는 것이 곧 무엇인가를 잘 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온전히 헌신하였지만 잘 해내지 못해서 그만두는 것과, 잘 해내지 못할것 같음을 핑계삼아 포기하는 것은 전적으로 다르다.
후자의 선택을 하면서 그것이 마치 전자인것마냥 위선을 떠는 스스로를 직시할 필요가 있다.
(사실은 의사결정 자체가 아닌) 완벽한 의사결정을 가능케하는 이른바 Perfect Information은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도, 어떠한 문제에서도 결단코 확보할 수 없다.
따라서 모종의 미숙을 기꺼이, 자발적으로 감내하고서 저질러야한다.
또한 웃기게도, 잘 해내었는지 아닌지도 그 이후에나 평가할 수 있는 일이다.
선택의 보류도 선택이라는 궤변에 맞서 싸워라!